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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모월모일 (박연준)

“저는 박연준 시인을 좋아해요.” 누군가 즐겨 읽는 책이 있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하곤 한다. 2013년 우연히 박연준 시인의 시(돌아보면 뒤가 파란)를 접하고, 단숨에 반했다. 짝사랑하는 시인이 생긴다는 건, ‘일단 믿고 볼’ 글이 생겼다는 것이고, 시인과 친구가 되어 언제든 시인의 세상에 여행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뜻이다.

2019년에 출판된 시인의 에세이,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에 대한 감상이 마르기도 전에 새로운 에세이, 모월모일이 나왔다. 일상의 활력소가 이렇게 자주 나와준다니 바지런히 일상을 살아냈을 작가에게 감사함과 모종의 존경심이 솟는다.

■ 오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름부터 귀여운 모월모일. 겨울-봄-여름-가을 순으로 작가의 모월모일을 함께 걸으며 일상의 즐거움을 느껴본다.

산문집 제목을 망설임 없이 ‘모월모일’로 정했다. 끔찍한 날도 좋은 날도 모월모일이다.

(..중략..) 생애의 모든 날을 그러모아 ‘평생’이라 부른다면 빛나는 날은 기껏해야 며칠, 길어야 몇 주밖에 안될지도 모른다. 이전에 나는 가능한 한 찬란한 날만 골라 서 있고 싶었다. 특별한 날은 특별해서, 평범한 날은 평범해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은 작고 가볍고 공평하다. 해와 달이 하나씩 있고, 내가 나로 오롯이 서 있는 하루. (서문 – 모월모일, 모과 中)

특별한 날만 목을 빼며 기다리다 오늘 하루를 쉽게 지나치지 않았나 돌아보았다. 작가가 자주 가는 카페, 좋아하는 발레, 남편의 머플러 등을 따라서 하루하루의 작은 행복을 쌓는 방법을 배운다. 운동 치료를 받는 것처럼 원래 걷던 삐딱한 자세를 곧추세우고, 아이가 걸음마 배우듯이 천천히, 다시 말이다.

■ 함께해서 든든하게 빛나던 날의 기억

행복이라는 말을 들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깔깔거리고 있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대개 나는 취해 있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좋아하는 사람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만큼 강렬한 행복의 순간은 없을 듯하다.

봄이에요. 사월이고요. 단 하루도 슬프게 지내지 않을 거예요. 나무를 실컷 보겠습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린잎이 ‘어린잎’으로 보내는 때는 짧아요. 금세 지나가죠.

가끔 사람도 한 그루, 두 그루 세고 싶어요. 내 쪽으로 옮겨 심고 싶은 사람을 발견한다면… 흙처럼 붉은 마음을 준비하겠어요. (사월 中)

기본적으로 사람 좋아하는 나지만, 결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특히 좋다. 나는 순해서 어디에나 잘 어울리고, 잘 웃고, 잘 터놓는 사람을 좋아한다. 1을 1이라고 얘기할 수 있고, 거기에 일과 인생을 진중하게, 열심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금상첨화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을 찾기 점점 어렵지만 나도 언제나 ‘흙처럼 붉은 마음’으로 준비하고 싶다.

■ 혼자여서 소소하게 빛나던 날의 기억

애주가에게 술과 친구, 파티는 필연적으로 얽혀있다. 비록 음주가무 중 ‘음주’에만 능해 한자리에 앉아서 주야장천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그래도 어울려 주는 고마운 친구들 덕분에 매주 1~2건의 술자리를 성취해내는!! 보통(?)의 애주가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이나 나는 혼자의 시간도 사랑한다. (혼술의 시간 역시도 말이다!)

창이 크게 난 카페가 보여 들어갔다. 공책에 떠오르는 생각을 끼적이고,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문득 이 낯선 도시에 혼자 있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었다. 당신과 싸운 후 차곡차곡 빨래를 개듯 할일을 하고, 감정에 휘말려 몸에 행패부리지 않고(감정은 때로 몸을 얼마나 혹사시키는지), 짐을 싸 여행을 떠나온 게 마음에 들었다.

(…중략…) 둘이 되지 못해 안달인 시간이 있는가 하면 혼자이지 못해 누추해지는 시간도 있다. 인간에겐 햇빛, 음식, 타인의 사랑만큼이나 ‘혼자인 시간’ 역시 필요한 법. 지금 당신도 멀리서, 나처럼 혼자일 거라 생각하니 그조차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좋아도 오래 붙어 있다보면 종종 상대의 빛을 보지 못한다. 혼자일 때 빛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둘이 될 때, 내 빛남으로 당신을 돌볼 수 있도록. 그 반대가 되어선 곤란하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발전 中)

이 글을 읽고, 마음에 쏙 들어 소리내 읽었다. 내 목소리를 귀로 들으며, 더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룸메이트 J를 불러서 한 번 더 읽었다(J도 박연준 시인의 팬으로, 내가 이 책을 다 읽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몸에 행패 부리지 않는다.’라는 표현과 ‘내 빛남으로 당신을 돌볼 수 있도록’이라는 표현이 특히 마음에 와닿는다. 몇 해 전 훌쩍 떠났던 군산 여행의 기억이 떠오르며 잠시나마 함께 행복해졌다.

■ ‘이유’ 없이도, 빛날 날을 위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도대체 왜?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미 마음을 굳힌 터라, 일일이 그들을 납득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나사 풀린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남기기 싫어 상대에 맞게, 각자가 납득할 것 같은 최선의 이유를 댔다. 그리고 내 나름의 이유는 언제나 반대하는 소리로 되돌아왔다.

가장 기가 막혔던 것으로 꼽자면 나한테는 ‘그래, 열심히 해라.’하며 통화를 짧게 마치고, 곧바로 엄마한테 전화해서 ‘여자는 아무리 똑똑해도 결혼 안 하고 살면 기구하다’라는 악담을 전해 들은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큰외숙모’라는 사람이 내뱉는 응원이 이런 종류이고, 내 부모마저도 완전히 지지하지 못하는 결정인 것을. 안다는 이유로, 모른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내 삶에 한 마디를 얹나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득해진다.

‘왜’라는 물음에 작아지는 게 시 쓰는 일이다. 시의 무용함 탓이다. 시는 어떤 필요에 대한 부응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존재다. 그러니 ‘무얼 위해’ 시를 쓰겠다는 사람도 없다. 시는 쓰는 자도 읽는 자도 애를 써야 흐르는 음악이다.

(..중략..) 초심을 지키는 일은 가장 어렵다. 나무에 오르는 사람이 작은 나무에 오르고 나면 큰 나무가 보인다. 기를 써서 큰 나무에 오르면 왠일인지 큰 나무도 시시해 보인다. 큰 나무든 작은 나무든 높이가 중요한 게 아니란 생각은 못한다. 성장은 위가 아니라 아래로 깊어지는 일이라는 것. 보이지 않게 이루어지는 일이란 것을 모른채 숲은 헤맨다. 성장의 비밀은 뿌리에 있다. (시 창작 수업에서 우리가 나누는 말들 中)

시시때때로 불어오는 세상의 수많은 이유에 곧잘 휘청이곤 한다. 휘청일수 있지만, 다시금 제자리로- 빠르게 돌아오고 싶다. 그렇게 내 이유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싶다. 함께여서 더, 혼자여서 더,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행복한 모월모일을 지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