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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편지로 씌여진 소설 – A가 X에게 (존 버거)

사비에르는 ‘테러’라는 죄목으로 이중 종신형을 받아 형을 살고 있다. 이중 종신형이란, 죄질이 나빠 종신형을 한 번 더 때리는 격으로 어찌어찌 감형을 받아도 한 번의 종신형이 더 있기 때문에 사실상 풀려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연인인 아이다는 면회도 쉽지않은 그를 그리며 감옥으로 편지를 보낸다.

편지로 이뤄진 소설 – A가 X에게

모든 내용은 주인공들의 한 토막의 편지(보내진 편지, 보내지지 않은 편지지, 편지지 뒷장에 적힌 남자의 글귀)를 통해 전개된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이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고, 그 모호함이 이 ‘소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 책은 사실에 기반한걸까, 소설일까- 알 수 없다.

여러 상황을 유추해보았을 때, 남자는 국민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정권에 반하는 어떤 조직의 리더로 보인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의 정권은 민간인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여자는 시종일관 남자를 그리워하며, 일상을 담담히 버텨낸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에 대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기에- 쉽게 쓰여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게 올라오는 먹먹한 감정에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웠다.

단순하기에 강인한 희망

기대는 몸이 하는 거고 희망은 영혼이 하는 거였어요. 그게 차이점이랍니다. 그 둘은 서로 교류하고, 서로를 자극하고 달래주지만 각자 꾸는 꿈은 달라요. 내가 알게 된 건 그뿐이 아니에요. 몸이 하는 기대도 그 어떤 희망만큼 오래 지속될 수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나의 기대처럼요. (40쪽) 

이들이 품는 희망은 간단하다. 다시 만나는 것. 결혼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 그 어떤 탄압에도 지지 않는 것. 억울하게 구타를 당하고, 생의 위협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않는 것. 그들의 희망은 단순하고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도 강인하다.

얼마 전 다시 본 영화 ‘김씨표류기’가 생각난다. 짜파게티는 주인공 남자김씨(정재영 분)를 일하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동기이다. 짜파게티를 먹겠다는 일념만으로 땀을 흘리고, 일종의 성취감을 느끼며 삶의 동력을 찾는다. 그렇기에 여자김씨(정려원 분)가 배달시켜준 짜장면 3 그릇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본인의 희망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찾아내야 한다.

덧없는 것은 영원한 것의 반대말이 아니에요. 영원한 것의 반대말은 잊히는 것이죠. 잊히는 것과 영원한 것이, 결국에 가서는,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들은 틀렸어요. (38쪽) 

부재가 무라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을 거예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죠. (거기에 대해선 그들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무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 (115쪽)

억울한 옥살이와 그로 인해 피폐해진 삶 속에서 두 주인공의 희망은 유난히 빛난다. 소설이 소설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한동안 세계 정세를 온 몸으로 느꼈다. 뉴스 한 줄짜리 소식이 누군가에게는 피 묻은 고함이었으리라,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 모두 어떠한 희망을 품고, 그 희망에 온 몸을 던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을 아이다와 사비에르의 사랑과 투쟁을 응원하며.

아이다가 사비에르를 지칭하는 말들은 다음과 같다. 미 구아포(스페인어로 ‘나의 멋쟁이’), 카나딤(터키어로 ‘날개’), 하비비(아랍어로 ‘내 사랑’), 야누르(이집트어로 ‘나의 빛’)… 부르는 호칭을 여러 언어로 쓰고, 특정 지역이나 시기를 가늠하기 어렵게 쓴 의도가 보인다. 억압과 탄압의 존재하는 모든 곳에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주 주죠. (92쪽) 

오늘날의 시련은 너무나 깊다. 이젠 사후의 지옥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제외된 사람들의 지옥이 지금 이곳에 세워지고 있으며, 똑같은 경고를 전한다. 오직 부만이 살아 있는 것을 의미있게 만들어 준다는 경고를. (139쪽) 

아이다가 사비에르를 지칭하는 말들은 다음과 같다. 미 구아포(스페인어로 ‘나의 멋쟁이’), 카나딤(터키어로 ‘날개’), 하비비(아랍어로 ‘내 사랑’), 야누르(이집트어로 ‘나의 빛’)… 부르는 호칭을 여러 언어로 쓰고, 특정 지역이나 시기를 가늠하기 어렵게 쓴 의도가 보인다. 억압과 탄압의 존재하는 모든 곳에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이 있기 때문이다.

2009년에 발간된 책이 2020년이 된 지금까지도 유효하기에 더 가슴이 아프다. 언젠가는 이 모든 투쟁이 ‘기록’으로써만 남길. 모든 이에게 평화가 임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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