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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화양연화를 중심으로 본 왕가위:영화에 매혹되는 순간

연말 선물로 받은 왕가위 인터뷰집, 왕가위: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이다. 왕가위라는 감독은 이름만 들어봐서 갑자기 내게 이 두꺼운 인터뷰+화보집을 선물해준 달구에게 “다른 세계에 한 번 담금질해보겠다” 호기롭게 이야기했다. 책의 초반부만해도 내가 과연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할 것인가 의문이 있었다. 감독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내가 볼 때 그 사랑은 꽤나 지독해보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치명적인 사랑, 개나 줘버려!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책을 읽다보니 호기심이 생겨 <화양연화>를 틀었다. 영화는 왓챠에서도 볼 수 있고 유투브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2022년 2월 기준).

영화는 ‘감각적’이라는 말 외에 더 표현할 길이 없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가 이렇게 세련될 수 있다니 역시 명작은 명작이다. 이름으로만 알던 홍콩 배우의 얼굴을 머리에 새긴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다시 책을 읽어 세계관을 확장하는 경험이 너무 새롭고 재밌었다. 이번 글은 화양연화를 중심으로 책의 내용과 영화를 리뷰한다.

■ 화양연화의 음악

화양연화의 한자어 표기는 花樣年華로, 꽃이 가장 화려한 시절을 의미한다. 영어 이름은 In the mood for love로, 미국의 스탠더드 팝송인 <I’m in the mood for love>에서 따왔다고 한다.

왕가위 영화의 특징이라 할 것은 기성 음악을 비중 있게 삽입한다는 것이다. 화양연화의 대표곡스러운 <유메지의 테마(Yumeji’s Theme, 유투브 링크)>는 주모운(양조위 분)과 진 부인(장만옥 분)이 손 끝 하나 스치지 않을 때부터 묘한 긴장감을 주며 이들의 관계에 깊이 침투한다. 이 음악은 원래 <유메지>라는 다른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라고 한다. 보통 기성 음악의 색깔에 영화가 묻히는 것을 염려하여 잘 안사용한다는데 이 감독은 다른 영화 OST를 자기 영화에 당당히 썼고, 음악을 솜씨 좋게 ‘화양연화화’시켰다. C 마이너의 슬픔이 베이스에 깔리고, 왈츠 박자는 쉽사리 변하는 감정을 긴장감 있게 표현한다.

냇 킹 콜의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Quizas, Quizas, Quizas 유투브 링크)>도 빼먹을 수 없다. 두 주인공의 불확실한 관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외도하는 배우자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연습을 하거나 외도를 추궁할 때 흐르는 이 노래는 마지막에 싱가포르로 떠난 주모운에게 진 부인이 전화를 할 때도 흐른다. 이전에도 마치 주모운과 진 부인이 정말로 연인 사이이고 이별을 하는 것과 같이 애절한 느낌을 주는데, 결국 이어지지 않는 그들의 관계를 대표하는 음악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늘 네게 물어봐 /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디 / 넌 늘 내게 이렇게 대답해 / 음, 글쎄, 아마도 / … /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 / 나는 지쳐가며 / 너는 대답하며 / 음, 글쎄, 아마도”

사비에르 쿠가트의 배신(Perfidia, 유투브 링크)은 왕가위가 너무 좋아해서 3편의 영화(아비정전, 화양연화, 2046)에서 사용한다. 감독이 어릴 때 듣던 라틴 음악이라고 한다.

화양연화(花樣年華)'의 매력 [펌] : 네이버 블로그

■ 화양연화와 60년대 홍콩

왕가위는 상하이에서 태어나 상하이 말을 썼다. 5살 때 홍콩으로 넘어왔다. 그를 표현할 때 “상하이의 피, 홍콩의 살”은 너무나도 적절하다. 그의 영화의 대부분은 홍콩 배경이지만 상하이의 하위문화, 즉 “완곡하고 세련되고 화려한… 우월의식이 있는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상하이에서의 어린 시절을 “펠리니스럽다”고 묘사한다(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탈리아 감독인 페데리코 펠리니에서 따왔다). 동시에 홍콩만의 국제 도시로서의 모습, 소란함, 생동감을 영화에 담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 책은 왕가위 감독의 홍콩을 “어린 시절 홍콩을 처음 본 남자가 내놓을 법”하다고 한다. 허름한 뒷골목의 세계를 실제보다 아름답게- 재창조하여 영화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만든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실제로는 방콕 촬영분이 더 많다지만 “왕가위의 어린 시절 당시의 홍콩”을 창조해내 특유의 분위기를 만든다. 상하이 출신 사람들이 홍콩에서 먹을 것 같은 식단을 짜기도 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 감독의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음식을 떠올려 상하이 여자가 요리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짜여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 먼지 낀 창틀을 통해 과거를 보다

손 부인(반적화 분, 진 부인의 집주인)의 마작 장면과 저녁 식사 장면은 완전히 감독의 어린 시절이었다고 한다. 손 부인은 전형적인 상하이 사람으로 모든 것을 알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진 부인의 외출이 길어지자 따끔히 말을 해주는 캐릭터이다. 주모운 집의 집주인은 홍콩 사람인 것은 흥미로웠다. 한 자리에 상하이와 홍콩의 문화를 섞는다. 한 쪽은 마작할 때조차 정장에 넥타이를 메고, 한 쪽은 잠옷 차림이다.

주모운은 당시 홍콩에서 유명한 작가 류이창을 모델로 썼다고 한다. 류이창의 소설 중에 <두이다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평행을 이루는 외도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유는 당시 홍콩이 보수적이었고, 간통이 ‘금기’였기 때문이다. 이웃의 개념도 재밌는데 집 화장실을 같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웃이었다. 원래는 10번의 식사에 걸쳐 외도의 전모를 펼치려고 했는데 영화가 너무 길어져서 포기했다고 한다.

■ 화양연화와 미술

미술감독이자 의상 디자이너, 영화 편집자, 그리고 왕가위의 제일 친한 동료이자 협력자인 장숙평의 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할 일에 대해 한 번도 의논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왕가위가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달하면 그대로 장숙평이 그 영화의 의상, 분위기, 촬영 세트를 준비해주는 것이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은 도대체 치파오를 몇 벌이나 입었을까?
영화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은 도대체 치파오를 몇 벌이나?

진 부인의 매번 다른 치파오 역시 장숙평의 손 끝에서 탄생했다. 준비했던 치파오만 약 30벌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정도가 당시의 보통 수준이었다고 한다. 당시 상하이 여성은 다른 사람 앞에서 편한 옷을 입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감독 왈, 영화에서 옷은 그녀의 기분을 말해준다고 하는데 다음에 영화를 다시 볼 때 주의깊게 봐야 겠다. 의상은 물론 헤어스타일을 만드는 데 몇 시간은 걸렸다고 한다. 뭔가 장숙평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고 다시해”를 반복했다고.

■ 화양연화와 즉흥 연출

이 영화의 원래 엔딩은 다소 충격적이다. 주모운이 진 부인에 대한 복수심(작가의 말에 따르면 원초적인 인간성)으로, 싱가포르에서 진 부인을 유혹하는 엔딩이다(너가 고상떨어봤자 내 부인과 너도 모두 똑같다라는 식의). 왕가위 감독은 화양연화를 촬영을 반쯤했을 때 장편영화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1막은 소개, 2막은 외도의 발견, 3막은 복수. 마지막 4막으로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하였는데 항상 후회가 남도록 마무리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4막에 대한 계획을 짰으나 이미 영화 완성이 1년이나 지연되고 있고 예산도 많이 초과된 상태여서 4막을 완성하지 못한 채 편집한 게 지금의 화양연화이다. 이뤄지지 않은 로맨스여서 사랑을 받았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이에 관한 감독의 변은, “누구든 영화를 만들면 스토리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가능성 하나하나마다 가격표가 붙어 있고… 최종적으로 손에 남는 건 지금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원했던 게 아닐 수도 있는 한 편의 영화인 거죠. 영화를 만든다는 게 사람들한테 당신이 가진 담배를 깊게 들이마셔보라며 내미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들이마신 부분이 화면에 담긴 것들이죠. 나머진 그냥 재일 뿐입니다.”

■ 그 외 소소한 이야기

외도는 전기밥솥에서 시작한다. 진 부인의 남편이 진 부인을 위해 일본에서 신상 전기밥솥을 사오자 주모운도 진 부인의 남편에게 밥솥을 한 개 더 사달라고 부탁한다. 이들의 외도는 이렇게 시작되고 이는 주모운과 진 부인의 외도도 불러온다(사실 나는 영화에서 기억나지 않는 장면, 꼭 다시 한번 더 봐야겠다). 전기밥솥은 아시아 여성의 집안일 해방을 뜻한다고 한다.

진 부인이 매일 밤 그릇을 들고 완탕면을 사러 나가는 것은 일종의 탈출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이웃들에게 보여주는, 외출의 핑곗거리이다.

진 부인의 본명은 <아비정전>에서 역시 장만옥이 연기한 수리진과 같다. 감독의 마음 속에서 화양연화는 <아비정전>의 ‘정신적인’ 후편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중경삼림> 이후에 정립된 핸드헬드 촬영(카메라를 손으로 잡거나 어깨에 들쳐메고 촬영하는 기법)을 버리고 트래킹 촬영(카메라를 삼각대나 돌리와 같은 이동 수단에 얹어 촬영하는 기법)으로 비좁은 아파트 건물을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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