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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사랑의 몽타주 (최유수)

몽타주(Montage)는 ‘조립(즉, 편집)하다’의 의미를 갖는 프랑스어 ‘Monter’에서 온 말이다. 영화 기법, 미술 등 분야에 따라 그 뜻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몽타주는 조각 조각 편집해서 나온 결과물을 의미한다. 최유수님의 에세이집, 사랑의 몽타주는 [사랑]의 여러 면모를 조각 조각, 깊게 살펴본다.

사랑과 감정은 동일한가?

나는 대체로 무덤덤한 편이어서 사랑과 감정을 분리해서 보는 작가에게 많이 공감했다. 글을 읽으며, 이런 나라도 감정이 폭포수처럼 솟구치는 순간인-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이별의 순간을 떠올려본다. 사랑이 내게 남긴 순간들은 어땠는가.

나도 그랬어. 감정을 발산하는 일은 황홀해. 감정은 자기한테 충실한 사람에게 황홀감으로 보답하거든. 하지만 사랑의 감정을 매 순간 꺼내어 전하는 것만이 감정에 충실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안으로 안으로, 내 안에 꾹꾹 눌러 담아서 쌓아가는 충실함도 있어. 감정을 바깥으로 꺼내야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안팍으로 모두 필요해.

(…)

나는 감정을 사랑과 동일시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감정에 충실한다는 것과 사랑에 충실한다는 것은 달라. 사랑에는 분명 감정을 넘어서는 어떤 의지가 필요하다고 믿어. 그래야만 이탈을 막을 수 있어. (그대의 우주 中)

회사를 그만두면서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해야했다. 몇 년간 속을 터 놓고 의지하고 지낸 선배들, 친구들, 후배들을 앞으로 자주 보지 못할 생각을 하니 퍽 아쉽고, 속상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과는 별개로 회사 일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과 다음을 잘 준비해야겠다는 기합, 모종의 기대감도 같이 들었다. 마냥 기쁘지만도, 마냥 슬프지만도 않다. 감정은 복잡미묘하기에 분명 사랑과는 다르다.

연애 초반, 사랑을 외치는 애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마음이 차오르고 가라앉는 속도가 다른 것 같아. 지금 마치 국물이 얼마 남지 않은 국통에 국자를 휘젓고 있는 기분이야. 금방 바닥에 닿고 달그락 거리는…” 내 비유에 당황했던 그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빨리 가자는 애인도, 천천히 가자는 나도 서로의 감정이 먼저였으니 결국에 우리 사이가 멀어져버린 것은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은 감정이고 차갑게 식는 것 또한 감정이다. 감정은 가변적일 수 밖에 없고, 수시로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 반면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에는 온도가 없다 中)

한때는 내 표현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남들도 나만큼 조금 느끼는 것을, 상대를 위해 과장해서 표현해주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이다. 그러나 연애를 몇 차례 겪어내면서- 감정의 증폭을 경험해보니 단순 표현력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무덤덤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사랑은 감정과 독립적이다.

■ 사랑의 태도

또 작가는 사랑의 여러 태도에 대해 말한다. 사랑이 막 시작되는 시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착각’에 빠지고, 달이 지구의 중력에 끌려 배회하듯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별안간 익숙해지고, 또 그것에 권태를 느끼거나 말 한 마디에 서운하고, 다시 풀리는 그 모든 사랑의 모습을 그린다.

사랑하는 사람의 방식을 헤아려 존중해 주는 것 또한 사랑이다. 차이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사랑의 본론에 해당한다. 이는 어쩔 수 없이 괴로움을 동반한다. 타인의 그 어떤 아픔보다 내 손톱 밑의 가기가 더 아픈 것처럼 나의 서운함이 그의 방식을 헤아리려는 마음보다 앞서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서로 맞물려야 한다. 방식의 차이를 인정하는 헤아림과 헤아림이 맞물릴 때 괴로움은 감내된다. 헤아림이 맞물리는 것은 사랑의 본론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공통 방식이다. (헤아림의 맞물림 中)

■ 사랑의 순간들

사랑의 순간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랑을 느끼는 그 순간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서로의 귓속에 사랑해라는 말을 주고 받는 그 친밀한 순간, 포옹을 꽈악-하여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사라진 그 따뜻한 순간, 나를 배려해준 어떤 말에 웃음이 번지는 그 기쁨의 순간, 생전 처음하는 경험을 같이할 때 느끼는 그 희열의 순간들 말이다.

그럼 행복한 시간들만 사랑의 순간인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내면을 성찰하고, 성숙해지는 시간은 투닥일 때 시작된다. 내 바닥을 끝없이 확인하고 후회하며 나는 비로소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되어간다. 그렇기에 사랑의 모든 면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와 헤어지더라도 그 사랑은 완전히 종결되지 않는다. 이별 후 점차 그 시간을 잊게 된다 하더라도, 바래지는 것일 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이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역사 中)

사랑은 서수화되지 않는다. 하나가 곧 전부인 단수명사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첫사랑, 두 번째는 몇 년 전의 누구, 세 번째는 지난 번의 누구. 이런 식으로 사랑의 순서를 구분하여 정렬하거나 나열할 수 없다.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한 사람에게로 향하는 사랑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갈래인 동시에 전부가 된다. 누군가를 거쳐갈 때마다 계속해서 합이 되는 것이다. (서수화 中)

짧은 에세이를 애인과 함께 읽으며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맞아, 그랬었지- 다음엔 이렇게 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랑이 내게 남긴 흔적들을 뒤적거렸다.’ 작가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다른 사람의 사랑의 모습을 통해 내 사랑의 모습을 보았다. 이로써 내 사랑의 몽타주도 얼추 그려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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